[공원/정원문화]우리 곁에 낯선 이웃, 가로수가 건네는 말

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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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뚜벅이 여행길에서 만난 뜻밖의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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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미지는 생성형 AI(제미나이)를 활용해 제작되었습니다.


길을 걷는다는 건 어쩌면 그 땅이 품고 있는 시간을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지난주, 복잡한 도심을 잠시 벗어나 제주를 찾았습니다. 뚜벅이 여행자의 발이 되어준 버스 안에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빨간 열매를 보며 기사님이 말을 건넸습니다.


“저게 요즘 서귀포 쪽에 가로수로 많이 심는 먼나무예요.
멀리서 보면 멋스럽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있죠.
그리고 옆에 보이는 건 하귤이에요. 먹기엔 시지만, 사계절 내내 꽃과 열매가 있어서 조경수로 참 예쁘죠.”


버스를 타는 내내 제가 사는 곳과는 다른 가로변 풍경이 신기했던 차에, 기사님의 친절한 한마디로 비로소 하나의 존재로 또렷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왜 도시의 길 위에, 각기 다른 나무들을 심어두었을까요?



| 가로수, 도시가 선택한 생태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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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이미지는 생성형 AI(제미나이)를 활용해 제작되었습니다.



가로수는 단순히 거리를 장식하는 요소가 아닙니다.
도시의 기후와 토양, 바람의 방향, 그리고 관리 조건까지 고려해 선택되는 도시 생태 전략의 중요한 축입니다.

서울의 대표 가로수인 은행나무는 매연과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견디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병충해에도 강해 도시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자랄 수 있는 수종입니다.
반면 남부 지방에서는 이팝나무나 배롱나무처럼 따뜻한 기후에 잘 적응하며, 계절마다 화사한 변화를 보여주는 나무들이 주를 이룹니다.

어떤 나무를 심느냐는 단순한 조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도시가 어떤 환경을 견디고, 어떤 풍경을 시민에게 건네고 싶은지에 대한 선택입니다.

서울에는 은행나무와 양버즘나무가 많고,  강원에는 왜 소나무가 많을까요.
그 답은 결국, 그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에 있습니다.

난대 기후의 제주는 사계절 푸른 상록수가, 혹독한 겨울을 지나는 강원에는 눈과 추위를 견디는 침엽수가 자리 잡습니다. 가로수는 그렇게, 자신이 서 있는 땅의 기후를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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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가로수 지형도: 우리 동네 나무는 누구일까?


우리나라 각 지역은 기후 특성에 맞춰 저마다 다른 가로수들을 '이웃'으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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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KBS바다


지역대표 수종이미지기후 및 특징
제주 & 남해안
 
먼나무, 후박나무, 담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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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선일보, "이 나무 이름이 뭐예요?" "이나무? 먼나무!" 

난대성 기후
- 겨울에도 온화하여 잎이 지지 않는 상록수가 주를 이룸.
남부(경상·전라)배롱나무, 이팝나무,
가시나무류(종가시, 참가시), 동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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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화한 일조량
- 여름이 길고 뜨거운 남부의 기질을 닮아 화려한 꽃을 피움.
중부 (충청)느티나무, 은행나무,
양버즘나무(플라타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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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반도의 생물다양성 / 느티나무
사계절의 조화
- 추위와 공해에 강해 계절의 변화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줌.
관동(강원)소나무, 전나무, 벚나무,
금강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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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내한성
- 혹독한 추위와 적설량을 견디는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
수도권
(서울/경기/인천)
버즘나무(플라타너스),
은행나무, 벚나무
d8804e7a1392e.png도시 적응력
- 미세먼지 저감 능력이 탁월해 '도시의 허파' 역할을 수행


▽  도시마다 다른 초록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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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KBS바다

이러한 흐름은 세계의 도시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프랑스 파리는 넓은 잎으로 그늘을 만드는 플라타너스를 통해 보행 환경을 개선해왔고,  영국 런던은 산업혁명기의 공해 속에서도 살아남은 플라타너스를 도시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일본 도쿄는 은행나무와 벚나무로 계절의 변화를 도시 한가운데로 끌어들여 왔으며, 미국 뉴욕은 열섬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수관이 풍부한 나무들을  적극적으로 식재해왔습니다. 싱가포르는 거대한 그늘을 만드는 레인트리를, 캐나다 밴쿠버는 단풍나무로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어갑니다.

도시마다 나무의 모습은 다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도시는 나무를 통해 기후에 대응하고, 시민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역(도시)대표 수종이미지기후 및 전략적 특
프랑스 - 파리플라타너스(Platamus)
여름철 보행 환경 개선: 잎이 넓어 짙은 그늘을 만듭니다. 석회질 토양과 대기오염에 강해 고전적인 파리의 거리 풍경을 상징합니다.
영국 - 런던런던 플라타너스(Platamus x hispanica), 시카모어 단풍나무(Sycamore), 라임나무(Common Lime), 은자작나무(Silver Birch)
산업화와 공해 극복: 18세기 산업혁명기 매연 속에서도 껍질을 벗으며 살아남은 나무입니다. 현재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탄소 흡수원으로 관리됩니다.
일본 - 도은행나무(Ginkgo biloba), 벚나무(Prunus subg. Cerasus)
계절 경관과 문화: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에 맞춰 계절감을 극대화합니다. 특히 벚나무는 도시의 상징이자 매년 봄 관광과 문화를 이끄는 핵심 요소입니다.
미국 - 뉴욕아메리카플라타너스(Sycamore), 미국풍나무(Liquidambar tyraciflua L.), 참나무(Oak)
열섬 현상 완화: 고층 빌딩 숲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잎이 무성한 수종을 선택합니다. 'MillionTreesNYC' 캠페인을 통해 도시 생태계를 복원 중입니다.
싱가포르레인트리 (Samanea saman)
열대 우림 기후: 낮에는 거대한 우산처럼 펼쳐져 뜨거운 햇볕과 폭우를 막아주고, 밤에는 잎을 접어 수분을 조절하는 열대 최적화 수종입니다.
캐나다 - 벤쿠버단풍나무 (Maple)
냉온대 기후: 추위에 강하고 배수가 잘되는 지형에 적합합니다. 가을이면 도시 전체를 붉게 물들여 국가적 정체성과 미관을 동시에 충족합니다.
호주 - 멜버른황금느티나무 / 평면나무
건조 기후와 가뭄: 건조한 날씨에 강한 수종을 선택하며, 기후 변화로 인한 극심한 더위를 식히기 위해 수관(나무 머리)이 넓은 나무를 집중 배치합니다.


| 기후위기 시대, 나무의 자리가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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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의도공원 ⓒKBS바다


최근에는 이 가로수의 지도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남부 지역에서 자라던 수종이 점차 북쪽으로 이동하고,  익숙했던 식생의 경계가 조금씩 흐려지고 있습니다.기온 상승이 만들어낸 변화입니다.
이는 단순한 풍경의 변화가 아니라, 기후위기가 자연을 통해 보내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가로수는 도시의 온도를 낮추고, 탄소를 흡수하며, 새와 곤충이 머무는 작은 서식지가 됩니다.

도시 생물다양성을 연결하는 ‘녹색의 혈관’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때로 ‘관리’라는 이름으로 나무를 지나치게 다루기도 합니다. 강한 전정은 나무의 생장을 방해하고, 생태적 기능을 약화시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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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좌측부터 ⓒKBS바다 / ⓒ조선일보


| 관찰과 기록, 그리고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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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KBS바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나무를 얼마나 많이 심느냐보다  그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느냐일지도 모릅니다.
이름을 알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그 나무가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보는 일.

그 작은 관심이 쌓일 때, 가로수는 단순한 ‘거리의 장식’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초록의 이웃이 됩니다.

이번 주말, 늘 지나던 길 위의 나무를 한 번 더 바라보면 어떨까요?
나무가 서 있는 자리의 시간과 기후를 떠올려보는 순간, 도시는 조금 더 깊이 있는 풍경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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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원고는 아래 자료들의 맥락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 본 내용은 서울그린트러스트 2026년 3월 뉴스레터 ‘이 봄이 지나가기 전에 읽어주세요 中 초록의 기지개, 연결의 발걸음’에 수록되는 내용입니다.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서울그린트러스트의 활동소식과 함께 국내·외 초록 이야기에 대한 뉴스레터를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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